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소카와 타다오키 (문단 편집) == 생애 == 어릴 적 아버지 후지타카가 위태위태한 쇼군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다보니 신변의 위협을 염려하여 아버지와 떨어져 숨어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면서 함께 활동해,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 휘하를 거쳐 아버지의 동료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단에 속했다. 성격이 격하여 전투에서는 선두에 서서 활약했고 노부나가는 이런 타다오키를 맘에 들어했다. 타다오키도 노부나가를 존경하여 부친 대까지 쓰던 가문을 바꾸었고,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부친 후지타카와 함께 머리를 깎고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탁을 거절했다. 게다가 타다오키는 노부나가에 대한 빠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자기가 죽을 때까지 노부나가의 기일을 챙겼다. 이름인 '타다오키'도 오다 노부타다의 '타다(忠)'를 따온 것. 한편 타다오키의 매부로 호소카와 가와 함께 단고를 통치한 잇시키 요시사다[* 잇시키 가는 본디 단고의 슈고 다이묘였는데, 아케치 미츠히데의 공격을 받아 패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요시사다가 끝까지 저항하자 오다 노부나가가 방침을 바꿔 구슬러 항복시키고 가신으로 삼았다.]는 아케치 미츠히데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주멸했는데, 이 과정에서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한을 품은 여동생에게 전후 살해당할 뻔 했다. 정실인 타마코(세례명은 [[가라샤]])를 향한 애정은 깊어서 그녀의 아버지인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혼하지 않고 유폐시켜 화가 미치는 것을 피했다. ...이긴 한데, 그 사랑의 정체는 [[가라샤]] 문서를 참조. '''그냥 [[얀데레]]다.''' 두 사람은 당대 제일의 미남 미녀 부부로 일컬어졌지만 그 실체는 [[콩가루 집안|콩가루]]였다. 히데요시의 크리스트교 금지령 발표 직후에 가라샤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격노하여, 그녀의 시녀의 코를 베거나 유곽으로 팔아넘겨 협박하면서까지 가라샤에게 개종을 강요했다고 한다. 또 가라샤의 아름다움에 반한 정원사를 손수 베어 죽였다고 하며,[* 가라샤가 정원에 나와 대야에 손을 씻고 있는데 정원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정원사를 베어 죽였다. 그때 대야에 피가 튀었는데도 무덤덤한 가라샤를 보며 타다오키가 "이 뱀 같은 것"이라고 내뱉었는데, 가라샤도 태연하게 "마귀의 짝으로는 뱀이 제격이니까요."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몇 통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히데요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임란 중에 조선의 [[도공]](陶工)을 끌고가 자신의 영지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한다. 일본 서부에 집중된 도자기 명산지는 이렇게 끌려간 도공들이 기반을 이룬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인들을 잡아가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한건 [[다이묘]]들의 공통된 행태였고 타다오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진주 대첩]] 당시 일본군 주장으로 참여했지만 [[김시민]]과 [[곽재우]] 등 조선 [[관군]]과 [[의병]]의 맹활약으로 인해 패배하게 된다. 그래도 아내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는지 장례를 당시의 가톨릭 예식으로 치뤘고 그의 영지에서는 교인에 대한 [[탄압]]이 다른 곳과 비교하여 매우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원인이 서군의 핵심 인물이던 [[이시다 미츠나리]]여서 그랬는지 동군에 제일 빨리 참가했다. 야사에는 기독교인에 대해 심하게 말하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반발하여 다투기까지 했다고 하니...[* 묘하게도 가토 기요마사가 죽은 뒤 1632년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토시가 구마모토 번주로 이봉되어 기요마사가 애써 지은 구마모토 성을 차지한다.] 딱히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단 기독교를 통해 생전의 아내를 투영했다고 보는 게 옳은 듯하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그의 거성 타나베 성[* 교토부 마이즈루시에 있는 윤곽식 평성이다. 나중에 에도시대에는 타나베번(田辺藩)으로 승격한다.]은 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지키고 있었는데 1만 5천 명의 서군이 쳐들어왔다. 후지타카는 잘 싸우다가 그가 죽을 것을 우려했던 후지다카의 제자이었던 하치죠노미야 토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 1579 ~ 1629)이 두 양군에 가서 설득하지만 실패하고 친형인 당시의 덴노 [[고요제이 천황]]에게 상소문[* 문서의 형태로 국왕에게 올리는 모든 문서 양식]을 올려서 그가 죽을 것을 염려했던 덴노가 산죠니 사네에다(三条西実条, 1575 ~ 1640), 나카노인 미치카즈(中院通勝, 1556 ~ 1610), 카라스마루 미츠히루(烏丸光広, 1579 ~ 1638)[* 카라스마루는 이후 고요제이 덴노의 여자와 밀통한 것이 이노쿠마 사건을 통해서 들통나자 관직에서 파면당한다.]를 시켜 양군에게 [[칙명]]을 내리자 성에서 물러났는데, 타다오키는 왜 끝까지 싸우지 않았냐고 아버지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역시 아버지를 위기에 빠뜨린 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타나베 성을 공격했던 서군 소속 오노기 시게카츠(小野木重勝, 1563 ~ 1600)를 자결하게 했다. 83살까지 살았으며 몇몇 자식들보다도 오래 살았다. 장남 호소카와 타다타카(細川忠隆, 1580 ~ 1646)는 가라샤가 자결할 당시 친정인 마에다 가로 도망친 처 치요[* 법명이 슈코인(春香院)이다. 생몰은 1580 ~ 1641]를 감싸다가 폐적 당했고(실제로는 마에다 토시나가[* [[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카가번(加賀藩, 폐번치현 후 [[이시카와현]])을 중심으로 하여 호쿠리쿠(北陸) 지방의 백만석(石) 다이묘로 성장한다. 참고로 백만석이라면 도쿠가와 쇼군가 다음가는 석고(石高)이며 지방 다이묘 가운데 최대이다. 여담으로 [[마에다 케이지]]와는 사촌뻘이다.], 아사노 나가마사[* 도요토미 정권 오봉행(五奉行) 가운데 한명으로 이에야스 암살 음모 가담 혐의로 근신 처분을 받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히데타다]] 편에서 참전하여 가문을 지킨다. 18세기 초 그의 후손인 아코(赤穂, [[효고현]] 서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성에서 예절 문제로 칼을 뽑다가 [[할복]]을 명받는데, 이로 인해 졸지에 주군을 잃고 낭인 신세가 된 휘하 가신 무사들이 주군을 위해 최후의 복수전에 나선다는 이야기가 일본 [[에도시대]]의 대표작 "[[추신구라]](忠臣藏)"이다.]와 함께 이에야스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아서라고)[* 폐적당하긴 해도 막대한 은거료를 받고 교토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1646년 타다오키가 죽어가자 화해하지만 아비가 죽고나서 곧 교토로 돌아가버린다. 아비가 죽고나서 1년도 안되어서 67세 나이에 죽게 된다.], 차남 호소카와 오키아키(細川興秋, 1583 ~ 1615)는 자기 대신 3남 타다토시가 가독을 물려 받은데다 자신은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도망쳤고 후에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측으로 참전했다가 아버지에게 잡혀졌지만 교토에 있는 동림원(東林院)에서 할복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 심지어 덴노까지 사면(赦免)해줬는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해버렸다.] 그래서 인질 시절 막부와 안면이 있던 3남 타다토시(細川忠利, 1586 ~ 1641)가 가독을 상속받았다고 하지만 먼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장남인 호소카와 미츠나오(細川光尚, 1619 ~ 1650)가 당주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